다시 시작

작년 4월에 시작한 프로젝트를 올해 2월에 엎게 되었다.

나는 현재 15년 이상 된 사내 ERP 시스템을 새롭게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작년 4월, PM 역할을 맡은 상사 한 분과 나, 동료 개발자 한 명, 총 셋이서 개발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고 데이터 마이그레이션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표님과 상사분의 지속적인 논의 끝에, 올해 2월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이 났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프로젝트 중단 소식을 듣고 나서 한동안 여유 시간이 생겼다. 그러던 중 대표님의 호출을 받았고, 상사분을 제외한 나와 동료 개발자 둘이서 대표님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두 가지였다. ERP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것, 그리고 PM이셨던 상사분은 퇴사하실 것이라는 것.

알고 보니 대표님과 상사분의 의견 차이가 프로젝트를 진행할수록 좁혀지지 않았고, 기획 단계부터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기획부터 제대로 다시 잡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 아래, 상사분과 협의해 퇴사를 결정하셨다고 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획부터 관여하는 게 처음이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 싶었다.

지금은 뭐하는데?

현재는 외부 프리랜서 PM분과 협업하며 기획을 처음부터 다시 진행 중이다.

처음에는 클로드를 활용해 사내 5~6개 도메인을 한 화면에 담은 프로토타입을 한꺼번에 만들려 했지만, 진행이 더뎌지면서 도메인 하나씩 끝내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아직 내가 직접 담당하는 도메인은 아니라서, 지금은 사내 직원들과 꾸준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업무 유스케이스를 하나씩 추가하고 다듬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깊게 생각하지 말기

프로토타입과 유스케이스를 수정하다 보면 자꾸 생각이 꼬리를 문다. UI/UX에 대한 고민, 이야기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유스케이스들… 한번 빠져들면 스스로 멈추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 있다.

“어차피 수정할 거니까.”

예전에 영상 일을 할 때는 상상도 못 했던 마음가짐이다.

영상 편집을 하다 보면 “이 장면, 다른 각도로 찍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포커스 나간 컷은 어차피 못 쓰는데” 같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촬영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게 되고, 편집보다 촬영에 훨씬 더 큰 부담을 느끼며 임했다. 한 번 지나가면 재촬영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반면 개발은 다르다. 수정이 비교적 자유롭고, 어떻게든 내가 수습할 수 있다는 감각이 있다. 물론 무분별한 수정이 독이 된다는 건 알지만, 가끔은 이 한마디로 머릿속을 비워버리는 것도 일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라는 걸 요즘 배우고 있다.

지금, 여기서부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한다는 게 처음엔 너무 아쉬웠다. 1년 가까이 쌓은 것들을 내려놓는 일이었으니까.

근데 막상 다시 시작하고 보니, 이전에 겪은 것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같은 도메인을 두 번째 보는 것은 분명히 달랐고,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잘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나가는 중이다.